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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푸른 점 하나

이층 끝 방을 화실로 꾸몄다. 폭신한 매트와 방 안 가득 장난감에 쌓여있던 그 방을 정리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손주 둘, 손녀 둘의 사랑방이었던 그 방을 정리 해야겠단 생각은 아이들이 하나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던 작년 여름이었다. 그와 맞물려 한국에서의 전시가 예상치 못하게 잡혀 그림을 그릴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챙겨야 할 장난감들은 박스에 넣어 아이들 집으로 보내주었다. 드로잉 테이블을 들여놓고 이젤과 그림 도구들을 정리했다. 창문 옆으로 쉴 수 있는 작은 소파를 들이고 턴테이블과 LP를 챙겨놓으니 아늑한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이곳이 나의 피난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이 집을 지어 이사 올 때 심었던 매화나무가 이 층 창문을 훌쩍 지나칠 만큼 키가 자랐다. 매년 하얀 매화를 너무 한가득 피워 봄을 알려주었던 나무는 이제 스스로 나뭇잎을 다 내려놓았다. 어느 사이 잎을 떨군 가지마다 붉고 작은 열매가 빼곡히 자리 잡았다. 아마도 꽃이 진 자리마다 한 여름을 지나면서 조금씩 맺은 보람인 듯싶다. 동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아침마다 햇볕이 가득히 들어온다. 햇살 아래 작은 열매는 붉은 보석 같이 반짝인다. 드로잉 테이블을 창문과 마주한 덕에 붉어지는 나무의 변화를 날마다 바라볼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오늘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루가 다 지나가고 창문마다 불이 켜지고 저마다의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간혹 잊고 사는 티끌 같은 존재 푸른 점 하나로 날 사랑할 일이다. 그러나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맹세하거나 정의하지 않을 일이다. 다만 내게 주어진 길 걸으며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해 내 분량을 덜어낼 일이다. 그리하여 가벼워진 몸으로 당신에게 날아갈 일이다. 푸른 점 하나로 나의 페르소나를 벗어내고 있다. 아니 가벼워지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붓끝에 물감을 찍어 하늘을 그리고, 언덕을 그리고, 들꽃을 한 아름 안고 있는 서정을 그린다. 우리의 시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기억하고 난 후, 기다리고 난 후, 아니면 사랑하고 난 후였을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수년이 되어 흘렀다. 밤새 기다리다 아침이 와도 때론 무뎌지고 닳아 없어진 어처구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날아갈 일은 나만의 고요를 찾는 일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 밤의 고요는 새벽의 고요와 사뭇 다르다. 혼돈과 고요의 차이는 종이의 앞면과 뒷면의 차이 같다. 혼돈 속의 고요. 고요 속에 혼돈. 요란한 강물의 물들을 바다로 다 흘려보낸 후 찾아오는 적막과 흡사하다. 서둘러 도착해야 할 거대한 미시간 호수의 고요가 그립다. 훅 불면 사라질 티끌 같은 존재로 살아간다.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할 존재이다. 맹세한다는 부질없음을 내려놓는다. 한없이 가벼워져 푸른점 하나로 날아 오른다.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간 후 기억이나 하겠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쏟은 시간과 열정과 땀방울을. 그럼에도 날 사랑할 이유는 오직 하나 독특한 나를 세상에 보낸 당신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그리고 밝아올 새벽의 고요를 기다리겠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드로잉 테이블 미시간 호수 그림 도구들

2024-10-2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입에 넣은 사탕은 달콤했어요   하늘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고요   손을 뻗어도 당신은 내 곁에 없어요       소란한 삶이 싫어 이곳에 왔어요   열 번쯤은 떠나왔고 몇 번은 도망쳤어요   멀리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지 말아야 했어요   잔가지에 걸린 하늘이 아득히 번져와요   꽃 한 송이 피워 당신께 가려고요       길에서 넘어진 노을을 주웠어요   흥건히 핏빛 되어 하늘에 걸려있어요   가까이 가면 뒷걸음치는 꿈을 꾸어요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어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이어요   서쪽 창가 물들은 고요는 아직 따뜻하고요       아무것도 아닌 게 될 때까지 밀려오고 있어요   하늘로 날아간, 슬픔 안으로 숨어버릴   어느 날 나는 노을이어요       호수를 바라 보고 서 있어요.     호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지만 다정해요. 앉아서 바라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서서 보려고 해요. 아침이 밝아 오는 호수 그리고 하늘, 하얀 물새들과 반짝이는 조약돌, 밀려오는 파도가 아름다워요. 이 세상을 떠날 때, 크고 위대한 당신 앞에 설 때 바로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생각도 가끔 하곤 했어요. 바라보지 못한 풍경, 만나지 못한 사람,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 사연들과, 안타깝게도 이 세상을 일찍 떠난 친구들의 이야기들과,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저 물새들의 대화와, 하얀 거품을 물고 출렁이며 다가오는 파도의 사랑과 속삭임이 그리울 때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했어요. 저 바다 끝 어둠을 뚫고 붉은 몸짓이 연기처럼 아니 안개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네요. 수평선으로 번져 가는 붉은 하늘은 아주 크고 동그란 물방울처럼 떠 오르고 있어요. 육안으로도 보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수면 위를 차오르고 있어요. 호수가 낳은 신비한 알 같아요.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프락사스의 몸짓 같아요. 이제 그 몸이 미시간 호수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해요.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침내 하루가 떠올랐어요. 신기하기보다 경이로워요. 하루가 떠오르는 동안 고요는 모든 것들의 입을 잠잠히 정지시켜요. 멀리 파도가 밀려오고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가 쓸려 왔다 빠져나가요. 호수의 표면에 새의 깃털 같은 윤슬이 반짝거려요. 하루가 또 이렇게 시작되고 있어요.     호수를 바라 보고 서 있어요.     호수와 하늘이 마땅한 곳에 연분홍의 띠가 수평선 가까이 드리워져요. 어둠이 서서히 찾아들기 시작할 때쯤 하늘은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어요. 호수의 수평선 위로 붉은 물감이 퍼지듯 번져 갔어요. 느린 동작같은 풍경 속에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낮이 밤으로 천천히 바꾸어 지고 있어요. 수평선 위에 띠처럼 번져 오던 노을은 벌써 하늘의 반을 덮어 가고 있어요. 그 반대편으로 하얀 보름달이 외롭게, 겸허하리만큼 의연하게 노을을 바라 보고 있어요. 이 풍경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요. 닮고싶은 풍경이에요. 일출과 일몰 사이로 하루라는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어요. 노을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노을이 되어 가요. 노을이 지듯 우리의 삶도 저물어 가겠지요. 그러나 낙담하지 마세요. 이제 우리 앞에 형형색색의 별이 뜰 거예요. 캄캄한 밤하늘에 등불이 되어주는 별들의 대화가 한창일 거예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당신의 길을 비취겠지요. 베개를 끌어안은 당신에게 잘 자라고 머릿결을 어루만져 주겠지요. 뭇별들이 수를 놓으며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겠지요. 유독 당신의 새벽 창에 끝까지 남아 곤한 잠자리를 지켜줄 별빛 하나 보이겠지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노을 미시간 호수 때쯤 하늘 수평선 위로

2024-08-26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게 넌 돌아오는 길이었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말하지만   소리 없이 다가오는 저녁이었어   너의 서 있는 자리, 그리고 노을이었어       깃털의 날림 같은 공기를 밟으며   무심한 듯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어   잎사귀에 구르는 이슬, 긴 가지마다   써 내려간 너의 노래, 그리고 몸짓이었어       서둘러 모아지는 잔가지들의 유희   아쉬움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어     너의 향기는 새벽을 깨우는   이슬이었는데   봄볕같이 스며드는 따뜻한   엄마 손이었는데   안겨 오는 바람처럼   흥겨웠던 날이었는데       돌아오는 차창 안으로 별이 스미는 날   내 힘으로 걷기 힘든 날   돌아서는 너의 뒷모습에 오랫동안   너의 이름을 부르던 날       오늘이 내일이 될 거야   내일도 오늘이 되어 지나갈 거야   기억이 차오르도록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생생한 기억의 그늘에 앉아 있으면 돼       높은 갈대숲도,   불어오는 바람도,   굽이치는 강물도,   너의 깊은 숨소리도   먼 길 돌아 스친다 해도   내게 넌 돌아오는 길이었어       이창봉 교수(Chicago 시 창작 캠프)의 12번째 강의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어제 시작한 듯 느껴지는 문학 캠프가 이제 막바지로 가까이 가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간다. 갈증에 단비처럼 다가왔던 시 창작캠프 20명의 열린 마음들이 마음을 열고 강의에 임했기에 곳곳에서 시심이 터지고 꽃이 피어나고 향기가 주변에 진동하였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감추었던 마음의 표출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누구를 위함도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새로운 아침이 깨어나고 한낮에 내리쬐는 햇살 아래 따사로움이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였다. 구름의 하얗고 푸르른 소망의 창들이 바깥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이고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 질 때까지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 노을을 바라보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단단히 잠가 놓은 눈물샘이 터지듯 감성이 터져 나왔다. 신기하고도 새로운 시간들이 어느 사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껍데기를 결코 바꾸지 못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감겨 있던 눈이 떠지고 닫혀 있던 귀가 열리고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동토의 땅이 녹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거둘 수 없던 마음 밭에 나도 모르는 사이 씨가 뿌려졌고 햇살과 비와 새벽이슬로 싹이 솟고 줄기와 잎사귀를 보이더니 단단한 꽃망울 피워 내기 시작했다. 머지 않은 시간에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저마다의 꽃들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이제 새것이 되었다.” 성경 말씀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바람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시 창자 캠프 동안 웃고 떠들고 서로의 벽돌을 허물어 가면서 시인의 마음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시 창작 캠프의 일환으로 1박2일의 문학 기행이 미시간 호수가 펼쳐지는 호변 에어비앤비에서 시작되었다. 간밤에 쏟아졌던 바는 마치 하늘 문이 열리고 퍼부었던 폭우였다. 어두운 호수가 밤새 일렁이고 번뜩이는 섬광 속에도 불구하고 새벽은 오고야 말았다. 모두가 일출을 기대했지만 구름에 가려진 해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일찍 깨어나 해변을 걸었고 간혹 구름을 헤집고 살짝 비친 붉은 하늘에 탄성을 지르며 어린아이처럼 발을 굴렀다. 새벽을 단장 하고 기다리고 있던 호수는 선물처럼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려 주었다. 새벽을 맞는 창문을 말끔히 닦고 찬물에 얼굴을 씻고 유인 반짝이는 눈망울로 새날을 기다릴 일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하고 슬픔에 가슴을 조였던 사람에게는 눈물을 닦아 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수고와 애씀이 사라지지 않도록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할 일이다. 소란 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호수 가득 내려앉은 고요를 꼭 닮은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미시간 호수 창작캠프 20명 창작 캠프

2024-08-1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파도

파도 1       파도는 곡선으로 오지만   때로는 직선으로도 온다   직선으로 와서 내 몸을 밀어   모래알처럼 쓸어 내기도 하고   자갈처럼 울음을 터뜨리게도 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신비하리만큼 아름다웠다. 멀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직선을 이루며 하나가 되었다. 호수에 가득한 파도가 멀리서 밀려오고 있다. 손짓하듯 잔잔한 거품을 물고 해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눈길을 고정하고 파도의 이동을 바라 보고 있노라면 또 다른 파도의 물결이 생겨나고 어느 사이 서 있는 발밑까지 적시며 세차게 밀려오고 있다. 부서지는 파도 앞에 서면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높은 나무 위에 여러 마리의 새들이 모여 재잘거리며 하루를 즐거이 맞이하고 있다. 멀리 날아갔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어디에서 오는지 여러 마리의 새 떼가 함께 모여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지난밤 거칠게 퍼부었던 비와 간간이 번뜩였던 섬광과 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를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파도와 함께 시간의 조각들이 흩어진다. 그 조각들은 윤슬이 되어 호수의 표면에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반짝이고 있다.   도대체 이 호수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누가 이처럼 충만한 물결을 물려 오게 했을까? 지난밤 퍼붓던 빗물이 호수의 수위를 높인 탓인지 거세게 모래가 밀려오고, 또 쓸어내리고 있다. 굵은 자갈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파도의 울음소리같이 들린다. 만물이 주로부터 지어져 다시 지은이에게 돌아가는 듯 보였다. 수천수만 년 전 아니 이 땅이 지어지고 이 우주가 지어질 때 까마득한 창세로부터 밀려오고 밀려갔던 파도가 오늘 이렇게 같은 모양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약한 것, 연약한 것만을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했던 우리의 모습.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는 우리의 일상의 모습이 아닌가. 파도를 보라. 그의 평생 잊지 못할 몸짓을 보라. 밀려오는 당당한 그의 허리를 보라. 눈을 들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파도가 밀려오는 모든 풍경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다. 우리의 삶에서 끝이라는 개념은 지워져야 한다. 지금까지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거친 비바람이 몰아쳐서 꼭 마지막 날이 될 것만 같은 어둠의 밤이 지났다. 아직 남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 동이 트고 있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직선의 화살을 쏘아 내리고 있다. 어둠을 뚫고 다시 밀려오는 파도를 본다. 어둡던 마음에 문이 열리고 다시 먼동이 트고 새날이 밝아 오고 있다. 지난밤의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조금의 빈틈도 없이 시계의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물려 돌아가듯 호수는 제 자리를 찾았다. 새날이 밝아 오면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로운 호수, 새로운 파도가 몰려오는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모래의 쓸림도, 자갈의 울음도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는 호수의 사랑은 오늘도 아름답고 또 새롭다. 윤슬이 보석 같이 빛나고 하얀 거품에 물방울이 생명으로 가득 찰 때 내 속 가득 차오르는 감격의 선물을 어찌 감당해 낼까?       파도 2       눈을 피해 살며시 다가오는   너의 손끝을 보고야 말았다   너는 나에게 잊힐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로 가서   평생 잊지 못할 몸짓이 되고싶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파도 미시간 호수 섬광과 하늘 밀어 모래알

2024-08-0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스티그마

구릉 진 턱, 제 얼굴에도 있더라고요 / 세월 가며 깊어진 주름이어요 / 새날 오기를 기다리어요 / 눈뜨는 매일이 새날이어요 / 깊어진 골에 씨를 뿌리고 / 봄을 기다리려고요 / 꽃 필 날을 손꼽으면서요 // 더디기도 하지요 / 쓰러지기도 하겠죠 / 더러는 밟히기도 할 거예요 / 내려다보는 하늘, / 올려다보는 보는 눈길 / 피어나는 흔적이 보고 싶어요 // 여러 소리 어울리면 / 새로운 소리가 되는 줄 알았어요 / 밀려오는 파도처럼 한 소리로 오는 줄 알았어요 / 여러 소리가 하나가 되기 어려운 가 봐요 / 나뭇가지처럼 더 작은 가지로 자라 / 저마다의 목소리가 되는 걸 알았어요 // 구릉 진 턱에 바람이 불어요 / 깊어진 주름에도 파도가 와요 / 당신 손으로 턱을 만들고, 주름이 깊어갔어요 / 피려고, 덮으려 애를 쓰면 감춘 아픔이 서러워 / 녹아 내리는 골이 시려요 / 밤마다 잔가지처럼 뻗어간 사유 / 깊을수록 쩍쩍 갈라지는 몸 / 그래야 동쪽 하늘에 아침이 오곤 했어요 // 눈발이 세찰 땐 가지로 울고 / 타는 햇살엔 잎사귀를 말며 숨 쉬지 않았어요 / 하늘로 토해낸 붉게 물든 그리움은 / 내 안으로 그어낸 상처가 되어 밤이 저물었어요 / 두 팔로 안을 수 없는 큰 동그라미 / 강을 거슬러 올라 산란하는 연어 / 다른 시간을 본능처럼 낳고 있어요 / 동그라미 끝을 이어 마무리 못하고 / 잠들지 못하는 시간 가슴에 절이며 / 깊어진 주름을 쓰다듬어요     깊은 숨으로 열리는 아침을 맛있게 마신다. 하늘의 신비, 땅의 생명을 어우르며 오는 시간 아닌가. 입춘이 지나가는 아침 향기는 청명하고 맑았지만, 난 뒤를 돌아 지나가는 겨울을 보고 말았다. 별들의 수를 세며 이름을 기억했던 날들을 보았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옷가지와 그림도구를 챙겨 삼척으로 떠났었다. 이른 아침 정라진을 떠난 통통배는 울릉도를 향하고 있었다. 일행 4명은 천신만고 끝에 배에 오르고 언제라도 꺼질 것만 같은 엔진 소리를 들으며 기대와 두려움 속에 있었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나뭇잎처럼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배가 신기하기도 했다. 등이 검은 작은 고래가 한동안 배를 따라와 무료함을 덜어주기도 했다. 동해에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였던 윤슬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동해는 크고 막막했지만 신비롭고 자유로웠다. 사방이 물이었고 배와 그 안에 사람들은 존재도 없었다. 물에도 지탱해 주는 뼈가 있을까? 혹 뿌리가 있을까? 동해는 어린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만질 수 없지만 형태로 존재케 하는 보이지 않는 엄청 큰 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네의 작은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마주한 집들이 보이는 지척의 그곳에서도 오랫동안 행복했었다. 그곳의 물결은 구불한 선이었고 때론 수많은 점들이었다.   나는 지금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너른 바위에 앉아있다. 호수라기보다 바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운타운 마천루에 접한 미시간호수가 아니라 Sheridan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 보면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다가갈 수 있는 미시간 호수. 가끔 동네 사람이 지나가다 들러 노을을 즐기는 그런 호숫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미시간 호수. 파도를 바라보다 물결 속으로 빠져든다. 먼 곳에서 가까워질수록 형체는 크고 선명했다. 큰 삼각형 주변으로 작은 삼각 모양들이 춤추듯 촘촘히 채워져 밀려왔다. 깊은 물의 뿌리로부터 작고 투명한 포말이 몰려와 해변에 부딪혀 사라지곤 했다.    나무는 가지와 잎으로 말하기보단 뿌리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삶도 보이는 것보단 감춰진 것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도 여전히 머리가 끄덕여진다. 파도 소리가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음색의 높낮이를 가지고 하늘소리로 마감하는 호수의 하루에도, 젊은날 동해의 윤슬 속에도, 너른 바위에 앉아있는 나에게도 보랏빛 흔적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미시간 호수 엔진 소리 호수 건너편

2024-02-26

미시간 호수 파이프라인 반대 소송

미시간 호수에 설치될 원유 파이프라인에 반대하는 소송이 시카고 연방법원에 접수됐다.   라인 5 파이프라인이라고 불리는 이 원유 수송 라인은 위스콘신 주 북부에서 시작돼 캐나다와 미시간 주 북부 사이의 국경까지 연결되는 645마일 길이의 수송관이다. 지난 1953년 건설돼 하루 2300만 갤런의 원유와 액체 천연가스를 수송하고 있다.     이 수송관을 통해 운송된 석유와 천연가스로 미시간 주 주민들의 겨울철 난방이 가능하다는 것이 수송관을 소유한 캐나다 기업 엔브릿지사의 입장이다.     현재 라인 5 파이프라인은 미시간 호수와 온타리오 호수를 구분하는 맥키나 해협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엔브릿지사는 미시간 호수 바닥에 터널을 뚫고 콘크리트로 만든 새로운 수송관을 설치해 향후 99년간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원유를 수송할 수 있다는 것이 엔브릿지사의 주장이다.     문제는 이 회사가 지난 1968년부터 원유 유출 사고를 내는 등 이미 안전상의 문제를 노출했다는 점이다. 만약 새로 건설되는 수송관에서 원유가 유출되면 미시간호수에 끼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 반대 주민들의 입장이다.   미시간대학의 물 센터의 모델링 결과에 따르면 이 수송관에서 원유가 유출될 경우 700마일에 달하는 5대호의 호변이 피해를 입게 되며 4000만명의 상수도원이 한 순간에 오염될 수 있다고 나타났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시카고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주민들은 엔브릿지사의 새 수송관 건설 계획을 중단해 달라고 요구했다. 현재 엔브릿지사를 대상으로 한 소송은 미시간 주정부에서 제기한 것을 포함해 7~8개에 달한다.     엔브릿지사가 새 수송관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소송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하며 육군 공병대로부터도 승인을 받아야 한다. 공병대는 2026년쯤 승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Nathan Park 기자파이프라인 미시간 미시간 호수 원유 파이프라인 천연가스로 미시간

2024-02-16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갈매기의 꿈

갈매기의 꿈    하늘 별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제일 늦게 나온 푸른 별 하나   새들의 무리에게, 붉은 저녁노을에게, 발길을 돌리는 지친 어깨에게, 슬픔과 눈물의 세레나데에게, 뜨겁고 깊은 그루터기에게, 서성이는 걸음 뒤안길에게, 작고 푸른 점 안의 슬픔들에게    춤출 수 있는 흥을 끌어내며 어루만지는 당신의 카타르시스 푸른 별에 살고 있는 우리 위대한 것을 말하지 전에 피 흘리고 땅을 정복한 역사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한낱 먼지일 뿐을 말하고 미시간 호수, 출렁이는 파도일 뿐 시야를 떠난 주저앉는 것들의 얇아진 생채기뿐임을 말하고 서쪽 하늘 피어날 작고 푸른 별 향한 힘찬 날갯짓임을 말하고   Lawrence와 Pulaski 사우스웨스트 코너 3층 건물. 그 옥상은 한 무더기 새들의 집이다. 종종 그곳을 지나갈 때 하늘을 덮는 새들의 무희를 볼 수 있다. 앞장선 한 마리 새를 쫓아 어마 무시한 그룹의 새떼가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간다. 길 건너로 낮게 날아가다 방향을 틀어 북쪽 먼 곳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이내 제 집으로 돌아와 빌딩의 옥상 근처를 난다. 늦게 발동이 걸린 다른 새 떼가 옥상을 떠나 비행을 시작한다. 하늘엔 먼저 비행을 즐기고 있는 그룹과 어우러져 두 군락의 새떼가 하늘을 겹치며 난다. 빵가루를 뿌려 주었는지 그 많은 새들이 한꺼번에 날갯짓을 퍼득이며 건물 건너 Walgreen 파킹랏을 가득 메운다. 주위에 사람들이 지나가도 잠깐 자리를 옮길 뿐 먹이를 먹는데 여념이 없다. 마치 비둘기들의 천국 같다.   지난 몇 개월 미시간 호수를 구석구석을 찾아 다녔다. 예쁜 등대도 만나기도 하고 노을 지는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밀려오는 파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찬 바람에 몸이 들썩이기도 하였다. 비 내리는 호수의 적막함에 꿈같은 아득함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눈 내리는 호수는 어느 다른 행성의 모습 같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였다. 이제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곳에도 반전은 있었다. 인적이 끊긴 해변에 갈매기의 무리가 모여 도닥거리고 있었다. 바람에 깃털을 부풀리며 한가로이 망중한을 즐기는 그곳은 또한 그들만의 천국임에 틀림없다.     Chopin의 Waltz of the rain을 들으며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찬바람을 등에 지고 넓은 호수를 나는 한 마리 갈매기가 외롭게 보였지만 호기로웠다. 마치 조나단 리빙스턴을 보는듯 하였다.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갈매기 이름이다. 조나단에게는 먹는 것보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했다. 단지 먹기 위해서의 비행을 거부하고 먼바다로의 비행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였다. 하늘 높이 날아 오른 후 한계속도를 넘어 수직 하강을 시도하기도 했다. 실패하면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그는 고난도 비행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수천 년 동안 우린 물고기 머리 밖에 찾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멀리, 더 오래 날아야 할 이유가 생겨났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조나단은 무리에서 쫓겨났다. 눈 뜨면 무리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러나 왜 사는가? 왜 나는가? 그것이 조나단의 질문이었고 마침내 그는 그 대답을 찾았다.     저자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조나단이 고민했던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꼭 우리의 삶이 멍하니 바라보았던 새떼의 삶 같아서, 물고기 머리를 찾아 온종일 물가를 서성거리는 갈매기의 삶 같아서 서글퍼지는 오후. 창공을 치고 날아오르는 조나단의 비행에 눈길을 주며 독백처럼 나에게 한마디 한다. “눈이 가르쳐 주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믿지 말아라. 마음의 눈이 가르쳐 주는 것을 믿어라 그러면 비로소 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늦게 나올 푸른 별 하나 떠오를 서쪽 하늘에 힘찬 날갯짓의 조나단 리빙스턴의 모습이 보인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갈매기 새떼가 하늘 조나단 리빙스턴 미시간 호수

2024-01-2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옹기종기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에 가면 가슴이 확 트인다. 마음 속 편안함이 푸른 물결위로 가득히 춤춘다.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 보다 보면 삶은 늘 그렇게 밀려왔다가 밀려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갈매기들도 밀려오는 파도를 응시하고 바람에 깃털을 날리고 있다. 한 마리 새가 물결 위로 사쁜히 앉는다. 나도 물결을 타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본다.   우리 식구도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어미닭을 중심으로 병아리들처럼 졸졸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엇이 그리 바쁘셨던지 밀려가는 파도처럼 우리에게 영영 작별을 고하셨다. 홀로 된 어머니는 어린 오 남매를 밤낮으로 돌보시느라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셨다. 곱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나눠 가져야 할 삶의 무게를 홀로 지고도 한마디 말이 없으셨다. 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어머니의 낙이었다.     큰 누이는 마음이 깊었다. 홀로 견디어내는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대전에서 큰 개인병원을 차리고 계신 큰 아버지를 찿아가 대학 진학을 상의했었나 보다. 큰아버지의 대답은 차갑고 냉정했다. 실망한 큰 누나는 마음의 병을 갖게 되었고 어둠이 그를 붙잡아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모아 놓은 알약으로 큰 누나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꽃이 피기도 전에 꽃봉오리가 세찬 바람에 떨어져 버렸다. 그때 나는 막 중학교에 입학했었다. 만약에 내가 큰누나와 대화를 가질 나이였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일을 막았을 것이다. 좌절을 딛고 원하던 공부를 마쳤을 것이고, 그 고비를 넘긴 누이는 환한 얼굴로 가정을 꾸몄을 것이다. 아마도 손자 손녀를 거느리고 이곳 시카고에서 옹기종기 노년을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파도는 세차게 몰려왔고 바람도 거칠어져 새의 깃털이 부풀어 올랐다. 이제 밤이 찿아오면 새들도 집으로 가겠지.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 가듯이. 우리 모두도 영원히 살 본향으로 돌아가겠지. 노을이 붉어지는 호수와 모래 위에 십자 발자국을 만드는 갈매기를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매 해 뒤란의 꽃들도 옹기종기 피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봄 꽃이 피고 지면 여름 꽃이 피어나고 그 꽃이 질 즈음 가을 꽃이 피고 추운 겨울엔 가지마다 눈꽃이 피었다. 꽃들의 삶이 그랬듯이 아버지의 환한 웃음이 우리를 행복의 꽃밭으로 이끌다 돌아가신 후 서글프게도 못 다핀 큰 누나가 하늘로 가셨다. 오랜 시간 남겨진 일들을 마치고 그토록 가슴에 고이 품었던 아버지를 만나러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언젠가 순서는 모르지만 우리도 모래 위에 갈매기 십자 발자국처럼 걸어왔던 여정의 뒤안길을 남겨놓고 내일도 걸을 것만 같았던 이 길을 마칠 것이다.   햇빛 따스이 내리쬐는 로즈힐 묘지(Rosehill Cemetery)에는 가운데 아버지의 묘, 왼쪽으로 어머니의 묘가, 오른쪽으로 큰 누나의 묘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오늘은 아버지께 국화 화분을, 어머니께 하얀 장미 다발을, 큰 누나께 꿈같은 안개꽃을 드리고 싶다. 그러면 먼저 가신 세분은 무슨 대화를 나누실까? 그냥 그 말 홀로여도 포근한, 어떤 뒷말을 대어도 정다운, 따뜻한 햇살 아래 옹기 종기 모여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가는 인생들을 향해 무어라 하실까?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가운데 아버지 갈매기 십자 미시간 호수

2023-10-0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당신이라는 나라

시카고는 미시간 호수를 끼고 있어서 동쪽 끝으로만 차를 달리면 바다 같은 호수를 만나게 된다. 날씨가 더워지는 7월부터 9월까지 많은 사람들이 호숫가를 찿아 더위를 식히곤 한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마천루가 등지고 바다 같은 넓고 푸른 호수가 시야에 펼쳐지는 이곳은 어느 휴양지와 비교해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퍼펙트한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미시간호수는 동쪽으로는 Michigan State를 북쪽으로는 Wisconsin State, 남쪽으로는 Indiana State를 걸치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도 바다 같은 호수를 만나게 된다.     비가 조금씩 뿌리는 호수를 바라보다 보면 호수와 하늘이 맞닿은 경계가 지워지기 시작한다. 어다가 호수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색깔마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호수는 서러워 서러워 경계를 지운다. 하나를 더 할 이유도 하나를 뺄 이유도 없어질 때, 호수는 하늘을 업고 잔잔한 물결 위로 내려온다. 내 곁에 있어도 늘 그리운 건 하늘이었고 호수였다. 어둠이 내리고 있다.(시인, 화가)   당신이라는 나라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비가 부리네요 / 출렁일 때 마다 등이 간지러워요 / 며칠째 말라 갔던 내 몸은 쏟아지는 빗물에 더 말라가고 말았어요 / 이해 못 할 거예요 / 출렁이는 나를 보며 말라 간다니요 / 내 발은 한없이 깊은 허공을 휘젓고 있어요 / 늘 닫지 못하는 하늘을 향해 오늘도 두 손을 높이 들어요 / 하늘로부터 오는 꽃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요 / 그대는 별일 없나요 / 내 몸은 옥색으로 바꿔지고 있어요 / 빗물이 꽃물처럼 내 몸에 구르고 / 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기억도 고르지 않은 내 파장 위에 놓여있어요 / 오늘도 뭍으로 내달려지만 / 하얀 거품만 물고 돌아 오기를 반복하고 있어요 / 발끝은 지쳐있는데 당신에게 닫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 비가 그치고 햇빛이 고개를 들 때면 하늘과 맞닿은 곳은 윤슬이 되어가요 / 나는 가장 따뜻한 푸른빛으로 변해 가고 있어요 / 잔 주름이 생겨난 곳은 하얗게 반짝이기도 해요 / 무료한 걸음은 간혹 하늘길을 만들어 당신에게 가려하네요 / 멀리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 하늘엔 반짝이는 별빛이 내게로 와요 /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내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보다 훨훨 더 까마득한 시절 / 한밤을 되돌아가도 만날 수 없는 태고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 그 별빛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티끌이었어요 / 나는 없답니다 / 이름도 생소한 먼 나라로 가야 해요 / 지구를 수천 번, 수만 번 돌아도 갈 수 없는 나라 / 당신이라는 나라 / 별빛 쏟아지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 그리운 것들은 늘 먼 곳에 있기에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아버지 할아버지 wisconsin state 미시간 호수

2023-08-14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날

새날   날이 밝아오고 있다 / 나는 네게 무엇이었는가 / 눈길을 걸어야겠다 /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 내 발이 녹고 눈이 녹을 때까지 / 불꽃처럼 타오르리라 / 다시 네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게 / 활 활 태우며 살아가리라 / 남은 재 한 줌까지   음력 설이다. 하늘 저편 지구의 반대편 사람들은 바쁘다. 새로운 해가 떴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떠난다. 차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북이 걸음을 걸어도 기어코 떠나고야 만다. 하늘의 반대편 이곳 시카고는 조용한 설을 맞이하고 있다. 신문이나 SNS를 통해 정보를 얻지 않으면 구정인지도 모르고 지나게 된다. 고향이 너무 멀어서일까? 너무 오래 이곳에 살아서일까? 소리 없이 새로운 하루가 이곳에서도 움트고 있다.   해가 뜨는 것과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구 위 모든 나무와, 들녘의 꽃들과,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와, 빌딩의 숲들과, 그 사이를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들 모르게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거대한 우주의 하늘 속에서 매일 기울어진 체 스스로 돌고 있다는 사실은 입증되어진 지 오래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서로 부딛히지도 않고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잘 살아가고 있다.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서로 밀쳐내면서 기막힌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지나고 있는 오늘 새벽 창가에 눈이 내렸다. 얇은 솜이불을 펼쳐 놓은 듯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어제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얼마 후 먼동이 트고 하루가 밝아 올 것이다. 밤과 낮의 구별은 단순히 공간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먼 곳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바라봄의 위치에 따라 밤이 될 수도 한편으론 낮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판단은 우리의 시선에 따라,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진실이 되고 거짓이 될 뿐이다.   벽난로에 불을 부친다.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나무가 탄다.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 침잠해 있던 마음의 열정이 다시 일어난다. 나무를 뒤집어 주면 더 활 활 타 오른다. 삶의 열정이 식어 질 때 무섭게 타오르던 불꽃도 사그라질 것이다. 불꽃같이 타오르는 새날이 되기를 마음 속에 다짐해 본다. 일 년을 불꽃같이 살아간 후에 다시 새날 앞에 설 것이다.   설을 맞으면서 사람들은 소원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다. 가족의 행복을 소원하기도 하고, 무너져 내린 건강을 회복하기 원할 것이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기를 소원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도모하기를 원할 것이다. 꿈이란 의지로 세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새싹이 자라나듯, 꽃이 피어나듯, 낙엽이지듯, 오늘같이 눈이 내리듯, 구름이 바람에 흐르듯이 내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생명력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있다. 새날에 대한 기대와 감사가 함께 다가오고 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설레임인가?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일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음은 또한 얼마나 귀한 일들인가. 나에게도 작은 소원이 있다. 내 속에 생각과 언어들을 꾸밈 없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원하고 있다. 창밖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아침은 샤프란 향기처럼 내 마음을 채우고 있다. 자주 찾는 호수에 나가 그리운 사람에게 그리움을 전해야겠다. 어서 일어나라고.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날 미시간 호수 소원 하나쯤 하늘 저편

2023-01-2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대는 내게 멀지 않구나

그대는 내게 멀지 않구나   새해에 나는 내게 용서를 빌었다네.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를 향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내게 용서를 빌었다네. 나를 자책하지 않겠으며, 삶이 힘들더라고 안고 가겠노라고 내 머리를 쓸어 주었다네. 잠도 잘 자고 눈을 뜨면 먼저 엎드려 당신께 기도하겠노라고 다짐했다네. 날 사랑하시는 당신을 나도 날마다 사랑하겠노라고 먼바다 같은 호수를 향해 고백했다네. 찬바람을 맞은 얼굴은 얼었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당신의 품에서 노는 한 마리 양이 되었다네. 호숫가를 걸었다네. 파도는 밀려 오는데 호숫가 얼음조각이 반짝였다네. 그대는 내게 멀지 않구나 생각했다네.   하려고 하기 보다 하지 않으려 했다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 좋았다네. 흔들리는 나무가지에도 가끔 살포시 앉을 오늘도 엄지와 검지 사이로 노을이 졌다네. 그대 곁으로 이사를 갈까 생각했다네. 목재로 지은 따뜻한 신뢰를 가진 집으로, 들꽃을 가득 꽃피우는 언덕을 가진. 저음의 첼로가 나즈막히 공간을 담고 하루가 지고, 회색이 어울리는 실내 깊숙한 그림자 되어. 순수의 냄새란 그런 거라 생각했다네. 냄새라기보다 향기라 하는 편이 낫지만, 귀뜸의 시간은 짧고 여운은 늘 오래 마음을 헤집었다네. 그대 곁으로란 말을 온종일 중얼거린 날이 있었다네 / 여린 몸매, 사슴의 눈처럼 웃는 당신의 웃음이 좋았다는 말은 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네. 하루를 지탱하는 끈이 팽팽히 힘을 쓰는 한 밤에, 프레지아가 시들은 창가에, 산 벚꽃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언덕에, 흙이 내 뱉는 입김 같은 새벽이 멀리 오고 있다네. 그리움이 쑥쑥 자라는 먼동으로 오고 있다네.     저물어져 가는 시간은 친근하고도 서글프게 다가왔다   빛의 꽃잎같이 아름다워서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얼굴이 되기도 하였으리라 이제야 겨우 내 손은 당신 가슴에 닿았는데 눈 밑까지 차오르는 물결은 어찌하라고 나의 자리로 돌아 와야만 하는 저녁이 싫었다 모든 게 지나치면 병이 된다는 말이 싫었다     꿈을 꾸었다 당신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꿈을 꾸고 싶었다 하나의 별이 내 몸 속으로 내려앉는 꿈을 꾸었다 이상하게도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시가 된 당신 가까이 가려 해도 가까이 갈 수 없어 평생을 걸릴 수도 있는 푸른 멍이 되어 꿈속에 깨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내 안을 찌르는 원치 않는 아픔이 되어 숨을 쉬지 못하고 힘들게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다시는 하늘의 별을 꽃처럼 피우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꽃이 진 텅 빈 뒤란이 나를 보는 것이 싫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나를 밟고 가세요, 가슴을 누르고 가세요 엎드린 나를 허물고 가는 세월의 헛기침 소리     저물어져 가는 시간은 소리도 없이 빠르게 가는데 별 빛 한 조각 소리 없이 내 몸을 빠져 나가고 있다 하늘엔 부서져 흩어지는 당신의 숨결이 가득하여     제일 먼저 보고 싶은 얼굴이 되기도 하였으리라(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미시간 호수 호숫가 얼음조각 헛기침 소리

2023-01-09

시카고-미시간 잇는 60마일 보행자 도로

시카고 남동부와 미시간주 뉴 버팔로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도로가 곧 완공될 예정이다. 60마일에 달하는 이 도로는 인디애나 듄스 국립공원도 관통하게 된다.     이 도로는 ‘마켓 그린웨이’로 불린다. 도로의 대부분은 이미 공사가 끝났거나 재원 확보가 마무리 됐지만 전체 도로를 완성해야 하는 일부분이 아직 미완성이다.   이를 위해 인디애나와 미시간 정부가 재정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만약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면 3년에서 4년 후에는 전체 도로가 완공돼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시카고의 시작점인 칼류멧 파크의 도로는 이미 완공된 상태다.     10피트 넓이의 포장도로인 마켓 그린웨이는 지역 주민들에게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아울러 차가 밀리는 일부 지역에는 대체 운송 수단을 제공해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미시간주 뉴 버팔로의 경우 여름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다운타운을 지나가는 마켓 그린웨이가 완공되면 쇼핑과 여가를 위해 찾는 주민들이 더욱 늘어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시카고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레이크프론트 트레일과 미시간주의 레이크프론트가 연결되도록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한 계획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한편 마켓 그린웨이는 프랑스 태생의 선교사 자케 마켓(Jacques Marquette)에서 유래했다.     마켓은 미시간주의 첫 유럽인 정착지 수 생 마리를 발견했으며 탐험가인 루이 졸리엣과 함께 미시시피강과 미시간 호수가 연결됐는지를 탐험하다가 현재의 시카고 지역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    Nathan Park 기자시카고 미시간 시카고 지역 시카고 남동부 미시간 호수

2022-11-23

얼어붙은 미시간 호수 배회 20대 유학생 경범죄 처벌

시카고에 유학 중인 20대 남성이 얼어붙은 미시간호수 위를 배회하다 호변에서 운동하던 주민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급기야 응급구조대가 출동해 구조를 벌이는 소동을 빚었다.   시카고 소방국 응급구조대는 지난 4일 오전 7시30분께 시카고 남부 하이드파크의 프로몬터리 포인트 공원 인근 미시간호수에서 24세 남성을 구조했다고 밝혔다.   이 남성은 시카고 일원에 폭설과 강추위가 몰아쳐 오대호 중 하나인 미시간호수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장관을 이룬 가운데 혼자서 호수 위를 거닐며 풍광을 즐기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주민들은 혹시나 얼음이 깨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고 결국 911에 신고, 경찰과 응급구조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출동했다.   목격자들은 문제의 남성이 호변으로부터 300m 이상 떨어진 곳까지 걸어나갔으며 40분 이상 배회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한 목격자는 "한순간 그가 보이지 않아 물에 빠진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현지 언론에 공개된 동영상을 보면 응급구조대원 2명이 고무보트를 가지고 남성에게 다가가 안전을 확인한 뒤 그를 보트에 태워 호변으로 데리고 나온다.   남성은 "호수가 얼어붙은 것을 확인하고 빙판 위를 걸어다녔다. 걸으면서 마음이 편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 사이렌 소리를 들었으나 처음엔 나 때문에 출동한 지 몰랐다"면서 "나중에서야 알아채고 호변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구조대원들은 "호수 표면 곳곳에 물이 보이는 곳들이 있었다. 특히 많은 양의 눈이 쌓인 빙판 위를 걷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구조 당국은 "안전한 빙판은 결코 없다. 자칫하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아시아계로 보이는 남성은 현지 언론에 직접 얼굴을 드러냈으나, 24세 유학생이라는 사실 외 신원정보는 공개되지 않았다.   신고된 지 30여 분 만에 호숫가로 나온 남성은 결국 공공질서 문란 행위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한편 비영리 민간단체 '오대호 구조 프로젝트'(GLSRP)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오대호에서 발생한 익사 사고는 총 98건. 이 가운데 미시간호수에서 발생한 사고가 절반에 달하는 47건을 차지한다.   폭스뉴스는 연방질병통제예방센터(CDC) 발표를 인용, 미국의 익사 사고 발생 건수는 하루 평균 11건, 연간 약 4천 명에 달하며 익사자 가운데 80%가 남성이라고 전했다.     시카고=연합뉴스 김 현 기자미시간 유학생 가운데 미시간호수 유학생 경범죄 미시간 호수

2022-02-0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 길의 끝, 당신의 집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이 있듯이, 핸드폰에 입력된 세계 구석구석의 지도가 저장된 있듯이 내 머리 속에도 지도가 있다. 그 지도 속에는 강도 있고 산도 있다. 골목길도 있지만 4차선 고속도로도 있다. 호수도 있고 호수를 닮은 하늘도 있다. 그 지도를 멀리서 무심히 바라볼 때도 있지만 때론 가까이 당겨서 꼼꼼히 챙겨볼 때도 있다. 멀리 바라볼 때 느끼지 못한 감정을 가까이 볼 때는 느낄 수 있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면 어떤 장소에서는 행복과 기쁨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와 행복해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슬픔과 어둠에 눌려 깊은 수렁에 빠져 우울해질 때도 있다. 내 머리속 지도에는 길과 방향만 보이는 게 아니라 감정이 담긴 추억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곳에는 유독 가족들 얼굴이 보여 아련한 그리움에 빠지기도 하고, 기억의 창고에 수북해 쌓인 먼지를 훅 불어내면 친구들 얼굴이 밤하늘 별처럼 하나 둘 반짝이며 다가오기도 한다. 유독 한 사람, 일생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어머니가 떠오르는 길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늘 흥건히 젖을 때가 태반이었다. 세상을 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내 속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지도의 시작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 그리듯 시작되었다. 집 근처의 골목길과 봉오리가 둥근 앞산, 종이배를 접어 띄었던 실개천. 느티나무가 쭉 뻗은 학교 가는 길, 사람이 복작였던 시장, 계단이 아주 높은 교회당이 보이는 언덕길. 집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작은 지도는 학교에 다니면서 더 넓어지고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집 주변을 벗어난 내 걸음은 먼 곳까지, 깊숙한 곳까지 지도 위에 길을 만들었다. 바다로 가는 길에는 짠내가 묻어나왔고, 사랑과 우정의 길목엔 여럿의 얼굴들이 겹쳐 그려졌다. 슬픔과 기쁨, 안타까움과 행복의 순간들이 구석구석 길 위에 담겨졌다. 지도 속 길들은 길 위에 또 길을 내기도 하고, 걸었던 길 옆으로 실개천 흐르듯 구불구불 흘러 가는 작은 길들이 생겨났다. 양쪽으로 곱게 머리를 딴 소녀를 처음 만나 짝사랑하던 버스 정거장. 야외 스케치를 떠나던 기차역, 긴 강줄기를 끼고 만난 시골 간이역, 하늘하늘 흔들리던 코스모스길 위로 솜사탕처럼 피어오른 뭉게구름. 책장을 넘기듯 연이어 떠오르는 길, 풍경, 추억들…. 젊은 날의 기억들을 새겨놓은 길 위로 안개처럼 그리움이 피어난다.     많은 날들이 지나고 수없이 많은 계절이 오고 또 갔다. 요즈음 그 수 없는 길들을 돌아돌아 다시 내게로 온다. 미시간 호수가 바다같이 떠있는 Lakeshore Drive 이방인의 거리에 길게 가로등이 켜진다. 멀리서부터 가까이로, 내 앞을 지나쳐 반대편 쪽으로…. 순간 어린 시절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길들이 가로등처럼 차례로 켜진다. 멀고도 긴 여정 속에 오늘도 난 집으로 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긴 자동차 행렬 속 맞은편으로 커다랗고 둥근 하루가 저문다. 시카고에 정착한 이후 내 지도는 많은 길들을 담지 못했다. 나의 발걸음은 긴 여행길을 제외하고는 거의 같은 장소 같은 방향으로만 뻗어 있다. 집에서 일터로 일터에서 집으로, 간혹 돌아오는 길에 호수 쪽으로, 집 앞 언덕으로 오르는 길 위로 길은 발자국 위에 또 발자국을 담고 있다.    삶은 끊임없는 걸음의 자국이고, 삶은 그 자국에 남겨진 향기가 아닐까? 나이듦의 깊이는 나에게서 시작된 아침이 너에게로 향하는 저녁으로 내려앉는, 주어의 전환이 아닐까? 꽃 피우듯 물들어가는 계절이 가고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날, 내 지도의 길은 하얗게 지워질 것이다. 언제 그 많은 길들을 걸었었나?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길 위에 나 홀로 서 있다. 세상은 그 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나의 삶을 움직이고 그 길로 나를 인도 했으며 그 길 위에 슬픔을 뿌리고 행복의 꽃을 피우게 했던 그분. 그분만이 내 지도, 그 위에 펼쳐 놓은 수많은 길들을 바라보지 않을까? 나이 들어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으실까? 긴 여정, 굽이굽이 돌아온 그 길고도 아득한 지도 속에서 이제와 돌아보니 그 길의 끝은 언제나 당신의 집이었다. 나도 모르고 걷던 나의 모든 길은 당신을 찿아가던 당신의 집이었다.(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머리속 지도 미시간 호수 친구들 얼굴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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